포스트 휴먼시대의 인간다움
출처: 포스트 휴먼시대의 인간다움 : 심미적 진정성 - 류도향 (전남대)
휴머니즘(인간중심주의) 시각에 갇힌 근대성을 넘어선 인간에 대한 두 가지 물음
1. 포스트휴먼은 근대의 계몽적 주체에 의해 억압된 타자인 신체, 감성, 자연, 여성의 목소리를 회복할 수 있는가?
2. 포스트휴먼은 인간의 본질이나 불면의 토대를 상정하지 않고 지금 이곳에서 비인간적인 것과 싸우면서 인간성을 보존할 수 있는가?
ㅁ 새로운 인간상
- ‘끊임없이 탈존하는 인간’(하이데거)
- '신경감응을 통해타자와의 유사성을 회복한 인간’(벤야민)
- ‘비인간적인 사회를 규정적으로 부정하는 인간’(아도르노)
논문에서는 포스트휴먼시대 인간다움의 필요조건을 ‘심미적 진정성’(ästhetische Authentizität)'라고 주장함
ㅁ 끊임없이 탈존하는 인간
- 하이데거: 앞선 세기에 대한 반성과 함께, 인류가 실현해야 할 참된 인간성이 무엇인지 깊이 성찰한 철학자
- 하이데거는 휴머니즘에 의거하는 인간이 표상하고 계산하는 수학적 사유의 주체, 즉 “사유기계(Denkmaschine)”로 전락됐다고 한다. 수학적사유는 존재자 전체를 무차별적으로 사물화하며, 질적인 성격을 담지한사물과 사건을 수량적으로 동질화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 그에 따르면 근대의 인간은 기술적 혁신의 필연적 순환 속에매어 있는 새로운 형태의 노예로 전락했다.
- 하이데거는 인간이 산업시스템의 부속품으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서는 사물화된 일상을 탈존함으로써 “본래성(Eigentichkeit)”을 회복해야 한다고말한다.
- 즉 보편적인 주체나 평준화된 인간이 아닌 “자기의 존재와 관계를맺고” 있는 각자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 이런 인간은 우리가 보통생각하는 자기동일성의 주체가 아니다. 인간 존재는 모든 존재자에게 무차별적으로 타당한 어떤 보편적인 유개념과 종개념을 사용하여 존재자 전체를 분류하고 체계화하는 방식으로는 접근되지 않는다.
- 인간은 저마다고유한 존재방식을 가지고, 세계와 전적으로 고유한 관계를 맺고 있기에서로의 우열이 평가될 수도, 공통의 기준으로 재단될 수도 없다. 인간은 자기자신을 대상화하고 표상하는 대신에, 고유한 존재로서 “생기(Geschehen)”하는 한에서만 인간답다는 것이 하이데거의 주장이다.
- 자기자신을 어떤 기준으로 대상화하지 않고 포상하지 않고, 고유한 존재로서 '생기'하는 한..?
- 타인의 기준으로 대상화하지 않는 것이지, 자기 자신의 기준으로는 대상화해도 괜찮은거 아닌가? 가끔 판단을 멈추면 좀 편하긴 하다 . 그때의 상태를 말하는건가?
- 탈존하지 않는 인간은 이성이 부족하거나 인격적으로 결함이 있는 존재가 결코 아니다. 단지 그/그녀는 일처리를 하느라 분주하고, 주관적 이해관심에 매몰되어 있으며, 일상의 향락을 좇느라 자신의고유한 존재에 대한 물음을 망각해버 렸을 뿐이다.
- 하이데거는 망각의상태에서 벗어나 탈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예술작품에서 찾고 있다.
- 고흐의 <농부의 구두>
- 감상자는 구두를 바라보면서 '사물의 용도성' = '밭에서 일을 할 때 시는 것' 쓰임새를 생각함(일상적-도구적)
- 탈존에 따르면 구두의 일상적- 도구적 실존상태를 넘어 대지 혹은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구두에 스며있는 의미가 드러날 때 구두로서 존재한다. 다시 말해 그림 속의 구두를 존재론적으로 바라보고 있노라면 구두가 놓여 있는 주변 환경, 구두를 신은 아낙네의 삶 전체, 고난과 근심, 출산과 죽음, 인내와 타락, 극복과 기쁨, 그리고 당대의 사람들이 구두와 어우러지며 맺은 여러 관계들이 펼쳐진다는 것이다.
- 아낙네가 신고 있는 구두를 사실적으로 묘사함으로써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아낙네의 구두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 속으로 우리를데려가는 현상학적 서술을 통해서 드러난다. 그 서술 속에서 구두는 단순한도구가 아니라, 인간과 인간 이외의 존재자들이 자신의 각자성을 드러내는 근원적인 존재의 터를 밝히는 예술작품이 된다.
- 하이데거는 도구를 제작하는 기술과 예술작품을 만드는 기술을 구분한다.
- 근대의 과학기술은 세계를 대상화하고 지배하는 도구,
- 즉 미리 의도된 목적을 이루는 수단으로서 인간의 자기동일적인 생산에 기여하는 인간학적 의미의 도구로 기능하는 데 경도되어 있다. 하지만 그가 보기에 이것은 기술의 본질이 아니다.
- 즉 미리 의도된 목적을 이루는 수단으로서 인간의 자기동일적인 생산에 기여하는 인간학적 의미의 도구로 기능하는 데 경도되어 있다. 하지만 그가 보기에 이것은 기술의 본질이 아니다.
- 그는 고대 그리스 테크네(τέχνη) 개념으로되돌아가 시적 실천으로서의 제작과 예술적 생산을 포괄하는 기술 개념을환기시킨다.
- 전자의 기술이 자연과 인간을 재현하고, 배치하고, 조절하고, 정렬하는 틀지우기의 기술이었다면, 후자의 기술은 존재자 이면에 은폐된존재가 스스로 운동하고 자신을 드러내면서 전개하도록 돕는기술이다.
- (이를테면...?)
- 테크네로서의 기술은 단순히 인간만을 위한 도구가 아니며, 인간만의행위도 아니다. 하이데거에게 그것은 존재가 스스로 자신을 드러내는 한가지 방식이다.14) 인간은 자연을 한낱 부품으로서만 파악하고, 나아가 자기 자신을 부품의 주문자로서만 이해한 결과 인간답게 거주하는 역사적삶의 처소를 상실하게 된다. 하이데거는 인간이 주체와 객체의 이분법에기초한 표상 체계가 존재론적으로 허물어지는 가운데 모든 존재자들의참된 존재가 여실히 드러나는 곳에서야 비로소 자신의 참된 존재도 회복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참다운 존재가 개시되는 개방된 장소를 가능케하는 것이 바로 테크네로서 기술이다.
- 근대의 과학기술은 세계를 대상화하고 지배하는 도구,
- 하이데거의 관점에서 볼 때 4차산업혁명이 참으로 역사적인 혁명이 되려면 도구로서의 기술에서 테크네로서의 기술로의 전환을 이루어야 한다.
- 다시 말해 4차산업혁명이 단순한 기술혁명이 아닌, 보다 나은 미래사회를 향한 혁명이기 위해서는 기술적-산업적 이용보다 예술적 변용에 지향점을두어야 한다.15)
- 사물이지만 사물 그 이상의 세계를 드러내는 예술작품처럼, 인간은 일차적으로 다른 인간이나 사회 시스템을 위한 도구적 존재자로살아가지만 동시에 끊임없이 자신의 도구화된 상태를 탈존함으로써 지배의 기술로 대상화할 수 없는 세계를 비은폐한다는 점에서 인간적이다.
- 하이데거의 구상대로라면 4차산업혁명의 기술은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일상을 낯설게 만들고, 실재에 대한 고정된 앎을 변형시킴으로써 존재가드러나는 세계의 지평을 열어줄 수 있어야 한다.
- 모든 것을 동질화시키고 획일화시키는 총체적 관리시스템의 동일성논리를 넘어 예술적 변용을 통해 각자 고유한 존재를 꽃피우는 차이의 놀이가 펼쳐치는 것이다. 다시말해 인간은 도구적 존재자들과의 기능적 연관관계에서 벗어나 자신의상태를 미래에로 개방하고 현재의 나를 끊임없이 재창조하는 방식으로세계와 열린 관계를 맺을 수 있어야 한다. (기술이 마치 옷처럼.. 예술이 되는.. 건축처럼.. 그렇게 될까?.. 그 사람들의 시대정신을 담고 정신적인 무언가를 해결해줄 수 있을까? )
- 즉 보편적인 주체나 평준화된 인간이 아닌 “자기의 존재와 관계를맺고” 있는 각자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 동물성 차원이란 자신의 환경에 매어 본능적으로 생존을위한 행동만을 반복하는 특성을 가리킨다. 하지만 동물과 똑같이 유한한신체를 가진 인간은 언제든 무력하게 일상의 현실에 매몰될 수 있다. 인간은 모든 것을 효율적인 생산과 이윤추구의 도구로 삼는 잘못된 자본주의시스템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타인을 억압하고 지배할 수 있으며, 얼마든지 자기 자신마저 그런 시스템의 노예로 만들 수 있다
- (굉장히 진화론과 아이러니하네. 그럼 이렇기 떄문에 더 진화한다는건가? - 이기적 유전자 )
- 합리성의 이름으로 지구에서 가장 야만적인 일들을 자행해온 인류의 동물성을 직시하고그것과 치열하게 대결하지 않은 탈존은 지금 이곳에 현존하는 비인사회를 의도치 않게 은폐하거나 합리화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 하이데거 나치 추종 옹호
신경감응을 통해 타자와의 유사성을 회복한 인간
- 유물론자인 벤야민은 미래적 인간의 잠재성을 하이데거와 달리 오히려 동물성에서 발견한다.
- 그는 우리가 보통 인간이라고 여겨온 이성적 주체가근대 문명에 의해 기획된 반쪽짜리 인간에 불과하다고 본다.
- 그에 따르면본래 인간은 신체를 매개로 자연과 상호유희를 하는 존재 또는 타자와 평화롭게 어울리는 유적 존재이다.
- 하지만 인간은 자신이 동물임을 망각한 채 이성적 주체로서 절대적 권능이 있다고 자임하며 자연 위에 군림해왔다.
- 나아가 인간은 인간 내부의 자연(충동과 욕구)을 억압하고 통제하고, 다른 인간을 지배하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방식으로 문명을 전개시켰다. 벤야민에 따르면 그 전개 과정에서 인류가 맞닥뜨린 파국이 다름 아닌홀로코스트다
- 벤야민에게 포스트휴먼은 우선적으로 휴머니즘에 내재된 이성의 자기파괴성, 즉 인간의 왜곡된 자연성을 반성적으로 자각한 인간이어야 한다
- 하이데거처럼 주체/객체, 정신/육체, 합리성/감성, 문화/자연, 남성/여성의 이분법을 존재의 배후로 제쳐버리는 것이아니라, 그러한 이분법이 지금 이곳에서 어떻게 관철되고 있는가를 자각하고 이분법적 대립의 형식 자체를 역사적으로 변경하는 변경하는 일이다. (이분법 자체가 나쁜게 아님)
- 미메시스 : 린 아이가 주변사물들의 핵심을 놀랄 만큼 통찰력 있게 간파하여 단번에 따라하는 것처럼말이다. 이런 행위를 가능케 하는 원리로서 미메시스는 주체가 객체를 대상화시킨 상태에서 그것을 재현하거나 그것의 겉모습을 모사하는 것과는다르다. 인간은 미메시스적 태도 속에서 객체를 자신에게 동일화시키는것이 아니라, 거꾸로 자신이 객체에게 동화된다
- 하지만 벤야민은 바로 이 미메시스적 태도야말로 숫자로 환산된 실험 결과와 통계 수치를 진리의 객관적 기준으로 신봉하고, 무한 경쟁 속에서 타인과 깊이 소통하며 관계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린 인간, 즉 합리성이라는 신화에 매몰된 채 병들어있는 근대인을 탈마법화하는 해독제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 그렇다면 미메시스적 능력에 근거한 자연과 인간의 유사성관계 회복은구체적으로 어떻게 가능할까? 벤야민은 20세기의 진보된 과학기술에 기대를 건다. 그에 따르면 주변 환경과 닮도록 피부색을 변형하여 생명을보존하는 카멜레온처럼, 신체를 통해 객체와의 유사성을 지각하며 삶을재생산하는 인간의 미메시스적 활동이 기술의 태곳적 유형이다. 이러한 태곳적 자연의 기술이 역사적으로 변형된 산물이 문명의 기술인 것이다.
- 그는 문명의 기술이 자연 지배를 위한 도구적 기술(제1의 기술)이 아닌, 더 나은 자연을 산출하기 위해 자연과 교감하는 유토피아적 기술(제2의기술)로 전환될 수 있다면,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의 상호유희적 공존의상태를 회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 다시 말해 예술은 개별인간을 실제 삶으로부터 분리시키는 데 필요한 이상적이고 낭만적인 자연, 우상적 이미지로 악용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벤야민은 나치가 예술통제와 선전활동을 통해 역사 이전의 신화적 세계에서 불멸하는 생명의 영혼을 마법적으로 소환하려 한다고 비판한다.
- 야민은 이제 예술이 현실도피적인 예술지상주의에서 벗어나 현실을변화시키는 정치적 기능에 복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술(공학)을 위한 인과 논리= science, 예술(공학)을 위하지 않는 인과 논리 = myth)
- 그는 정치적 기능을 수행하기에 가장 알맞은 새로운 예술장르로 영화를 꼽았다. 카메라, 녹음, 복제, 영상 기술 등 20세기의 최첨단 기술들이 동원된 영화는 친숙한 대상의 세부 사항들과 진부한 환경을 다큐멘터리적으로 관찰하고 새롭게 기술할 수 있다는 것이다. (...) 잠재된 대중의 “신체적 신경감응(lebiche Innervation)”29)을 집단적으로 일으킬 수 있다고 말한다.
- 야민에 따르면 인간은 신체적 신경감응을 통해 계급 없이 평화롭게어울리던 원시공동체에서의 지각과 경험을 상기할 수 있다. 그것은 주체와 객체를 적대적으로 대립시키는 자율적 이성(autonome Ratio) 이전에 피와 살을 지닌 인간으로서 유기적 또는 비유기적으로 연결된 인간학적 공통성을 각성하는 것이다.
- 야민은 이러한 신체적 차원의 각성이 없이는개개인을 원자적 주체로 만들어 가장 효율적인 위치에 배치하고 관리하고 통제하는 비인간적 사회의 기만을 간파할 수 없다고 본다. 다시 말해신체적 신경감응이 없는 개인들의 연대는 의식의 차원에서 가상적으로통일된 개별자들의 집단이기 때문에 주체와 객체를 대립시키는 사회의지배 형식을 반복, 재생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신체적신경감응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파편화되고 소외된 공동체 감각을 회복함으로써 지배와 억압이 없는 사회를 향한 집단적 실천을 가능케 하는 참된혁명의 동력이다
- 그는 정치적 기능을 수행하기에 가장 알맞은 새로운 예술장르로 영화를 꼽았다. 카메라, 녹음, 복제, 영상 기술 등 20세기의 최첨단 기술들이 동원된 영화는 친숙한 대상의 세부 사항들과 진부한 환경을 다큐멘터리적으로 관찰하고 새롭게 기술할 수 있다는 것이다. (...) 잠재된 대중의 “신체적 신경감응(lebiche Innervation)”29)을 집단적으로 일으킬 수 있다고 말한다.
- 그는 우리가 보통 인간이라고 여겨온 이성적 주체가근대 문명에 의해 기획된 반쪽짜리 인간에 불과하다고 본다.
비판: 하지만 벤야민이 20세기의 초현실주의 예술운동과 영화에서 찾은 희망은 왜 현실화되지 않았을까? 21세기의 진보된 디지털 기술을 통한 예술은 제2의 기술이 될 수 있을까? 디지털 아트는 디지털 정보를 활용함으로써 일상의 지각을 해체시키는 새로운 이미지를 창출할 수있고, 이미지, 소리, 촉각 등 복합감각적인 표현을 통해 벤야민이 강조한“지각의 심화”31) 또는 “지각구조의 변화”32)를 일으키는 데 용이하다.33) 또한 디지털 아트는 예술가와 수용자의 상호작용성(interactivity)을 극대화함으로써 인간과 인간의 깊은 예술적 교감을 가능케 20세기에 등장한 예술 운동보다 급진적인 정치적 기능을 수행할 수 있을까?
4. 비인간적인 사회를 규정적으로 부정하는 인간
- 야민의 미시론적 유물론 기획을 비판적으로 계승한 아도르노는 신체적 신경감응으로부터 인간다움의 가능성을 찾는 그의 통찰에 전적으로동의한다.34) 하지만 그는 벤야민의 기획이 인간의 신체를 사물화시키는자본주의 사회의 메커니즘에 대한 철저한 인식 없이 소박한 낙관적 입장에 머물러 있다고 비판한다. 그는 홀로코스트의 비극을 피해 망명을 떠난미국에서 유흥과 놀이의 시간조차 자본의 첨병으로 삼는 문화산업의 실제를 목도한다. 후기자본주의 사회의 기술은 “지배의 합리성 자체”35)라는그의 주장은 벤야민이 제2의 기술에 걸었던 혁명의 기대가 공허한 추상이되어버린 현실을 고발한다.
- 도르노 또한 벤야민과 같이 주체와 객체의 이분법을 넘어 객체와 놀이하고 화해할 수 있는 미메시스적 태도를 회복하는 것이 관건이며, 그런태도를 보존하고 있는 최후의 영역이 예술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그최후의 영역마저 점령해버린 후기자본주의 사회의 부정적 총체성을 “예술의탈예술화(Entkunst der Kunst)”36)라는 테제를 통해 비판한다.
- 예술가들은살아남기 위해 “미메시스적 계기, 즉 어떠한 사물적 본질과도 결합될 수 없는 계기"를 대중들의 입맛에 맞는 상품으로 만들어야 하고, 동시에 대중들은 '미메시스적 잔여물 mimetische Restbeständ'인 자신의 충동들 (Regungen)'을 이미 입맛에 맞게 만들어진 예술작품에 투사한다.
- 아도르노는 예술작품이 객관적 측면에서 일상의 사물과 구별되지 않고, 주관적 측면에서 감상자의 심리상태를 해소하는 수단으로 전락해버린 예술의 탈예술화 경향 속에서 미메시스마저 후기자본주의 사회의 총체성 속으로얽혀 들어간 경험적 사태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다
- 음악과 같은 외견상부차적 영역에서조차도 사회적 총체성의 위력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 벤야민은 영화를 감상하는 대중들의 개별 반응이 서로를 컨트롤하면서신체를 매개로 한 집단적 수용이 일어난다고 주장한다. 뿐만 아니라 그는마음을 가다듬고 주의력을 최대한 기울여 정신집중을 해야 하는 전통적인예술감상과 달리, 영화 감상은 정신분산의 상태에서, 즉 의식을 기울이지않아도 습관적으로 이루어지는 촉각적 수용의 형태로 신체적 신경감응을일어킨다고 낙관한다. 하지만 아도르노의 입장에서 벤야민은 사회적 총체성과매개되지 않은 신체의 영역이 원래부터 있는 것처럼 가정하는 관념론적오류를 범하고 있다.
- 아도르노는 미메시스와 합리성의 매개를 통해 비인간적 사회에 저항하는 인간의 모델을 “진정한 예술작품(das authentische Kunstwerk)”39)에서찾는다. 그에게 “진정성(Authentizität)”은 예술작품을 질적으로 평가하는규범적 개념으로 사용된다.40) 진정성 문화는 18세기 낭만주의 운동에서유래했지만, 진정성이란 말이 처음 학문적으로 개념화된 것은 20세기 아도르노에 의해서였다.
- 첫째, 진정한 예술작품은 세계의 적대적 상태에 미메시스하면서 지배적 현실에 의해 가려진 비동일적 색채들을 들춰낸다.
- 비동일자는 “객체 속에 객체적인 요소”, “객체에서 정신화될 수 없는 것”, “주체에서 빠져나가는 것”44), “주관적 반성 속에서 소진되지 않는 것”45)을 가리킨다. 동일성 사유의 차원에서 비동일자는 “자본주의 하에서 억압된 것, 즉 동물, 경치, 여인”46)과 같은 것을 가리킨다.
- 예술작품은 계몽의 과정에서 억압되었지만, 인간의 신체를 통해 자연사적으로전승된 미메시스 능력, 즉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의 유사성을 지각할수 있는 힘을 여전히 보존하고 있다. 그런데 예술작품은 그 힘을 주관적감정의 투사에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궁핍(Bedürftigkeit der Welt)”47), 허위가 되어버린 부정적 총체성의 현실을 말하는 데 쓴다
- 째, 진정한 예술작품은 “자율성(Autonomie)”과 “사회적 사실(fait sociale)”이라는부정변증법적관계속에서“내재적형식법칙”(immanentes Formgesetz)52)을 형성한다.
- 예술작품은 현실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의재배치의 시범을 보인다.”55) 이처럼 아도르노에게 자율성은 언제나 사회적사실과의 부정변증법적 관계 속에서 생성된다.
- 동일적인 것과 비동일적인 것의 동일성”(Identität des Identischen und des Nichtidentische)56)을 찰나적으로 이루면서 기존의 사회적 연관관계를 내부로부터 파괴하는 새로운 질서를 찰나적으로 구성한다.
- 기존의 역사적 현실 속에서 억압받고 배제되고 있는 타자들의 고통을 배제하거나 추상해버리지 않고, 바로 그 역사적 규정성과 매개된 새로운 형식을 통해 진정한 예술작품은 “규정된 사회의 규정적 부정(bestimmte Negation der bestimmten Gesellschaft)”58)이다
- 셋째, 진정한 예술작품은 일시적이다(vergänglich). 아도르노는 예술작품의진리내용이 드러나는 “순간(Augenblick)”을 “불꽃(Feurwerk)”59)처럼 환히비추지만 이성적으로는 규정불가능한 “신의 현현(appiriton)”, “지속이라는경험의 세계의 속박에서 벗어나지만 경험적인 현상으로서 나타나는 이데아 현상, “반짝 비추면서 사라지므로 의미를 추적할수 없는 문자(Schrift)”61)와 같이 비유적으로 말한다. 그 순간에 예술작품은객관화되어 정지해있는 “사물(Ding)”이지만, 그와 동시에 역동적으로 살아움직이는 “힘의 장(Kraftfeld)”이다. 예술작품이 마치 태곳적 마나(Mana)처럼살아있는 정령으로 나타나는 순간에 주체의 표상체계를 뒤흔드는 전율이일어난다. 주체가 이러한 전율을 경험하는 것이 아도르노가 강조하는“심미적 경험(ästhetische Erfahrung)” 이다.
- fundamental한 주춧돌이라 일시적이지만 동시에 역동적인 진화의 한 디딤돌. 그래서 일시적이면서 동시에 영원함.
- 첫째, 진정한 예술작품은 세계의 적대적 상태에 미메시스하면서 지배적 현실에 의해 가려진 비동일적 색채들을 들춰낸다.
심미적 경험의 순간은 벤야민이 몰락했다고 선언한 예술작품의 아우라, 즉 “여기와 지금(hic et nunc)”62), “숨결(Hauch)”63), “분위기(Atmosphäre)”64), “현상으로서 거리(die Ferne als Phänomen)”65)와 무관하지 않다. 아도르노는벤야민의 아우라 상실 테제를 비판하면서 아우라를 인위적으로, 기만적으로환생시키려는 사회의 총체적 경향을 순간적으로나마 정지시키는 아우라를구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66) 왜냐하면 참된 의미에서 아우라는 홀로코스트처럼 총체적으로 부정적인 경향의 사회에 내재하는 “인간적인 것의반사(Reflex des ...Menschlichen)”67)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인간적인 것이란 객체와의 미메시스적 관계 속에서 지배와 폭력이 없이 생산적 사회적노동에 이른 예술적 작업, “부드럽게 작품의 윤곽을 쓰다듬으면서 작품을명료하게 표현함으로써 또한 온건하게 만들기도 한 손길에 대한 기억”68), 즉 “사물에서 잊혀진 인간적인 것의 흔적”69)을 가리킨다. 이와 같이 예술작품에서 피어오르는 아우라는 그 흔적과 기억을 상기시키는 것이 바로아도르노가 고집하는 예술작품의 “진정성”이다.